Monthly Archives: October 2001

스페인의 정열, 세비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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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의 유스 호스텔에 있던 나의 룸메이트는 말레이시아에서 왔다는 나이 지긋한 건축가 한 명과 호주에서 온 내 또래의 아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분은 유럽이 벌써 세 번째란다. 세 번의 여행동안 스페인을 못들러서 스페인만 여행하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무척 혈기 왕성했던 이 여인은 아침 일찍 나가서 오후6시가 되면 어김 없이 정각에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곤 샤워를 하고 책을 읽었다. 저녁때 내가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으면 그녀는 또 어김 없이, 샤워를 하고 나서는 절대로밖에 나가지 않는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녀는 시드니 쉘던의 소설을 읽었는데, 말레이시아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 물어보자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영어라고 대답했었다. 물론 말레이시아어가 따로 있지만 공공기관을 제외하고는 모든 곳에서 영어를 쓴다는 것이다. 은행이나 작은 식당, 길거리의 가판대에서도. 어떤 기분일까. 내가 사는곳에선 모두가 다른 나라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호주아이는 작년 9월부터 여행을 하고 있는 아이었는데, 대부분의 서양 아이들이 그러듯이 영국에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여행을 하고 있단다. 그때가 6월이었는데..부모님이 보고싶다거나, 집이 그립지 않냐고 물으니 웃으며 그래서 작년 크리스마스때 부모님이 영국으로 자기를 보러 왔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올해 크리스마스엔 집에서 보내고 싶다는 것이 그녀의 작은 소망이었다.

세비야에서 3일을 있었는데, 첫 날은 알카자르를, 두 번째 날은 대성당과 황금의 탑을 보러 갔었다. 두 번째 날은 거의 하루종일 걸었는데 그 더운 날씨에 대성당에서 황금의 탑까지 걸어가던 코스가 가장 큰 고비였다. 그 거리가 상당하기도 했지만 옆으로 말이 끄는 마차가 지나가니 타고 싶은 유혹을 견디는 것이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물론 마차를 타려면 택시비보다 더 비싼 대금을 지불해야 하고, 게다가 마차를 타고가는 백인들의 한 결 같은 부르주아틱한 분위기가 너무 싫어서 마음이 가질 않았다. 거의 40분을 걸어서 도착한 황금의 탑은 과달키비르 강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원래는 황금의 탑 맞은편에 은의 탑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쌍으로 이 도시를 지키는 탑이었던 거다. 지금은 은의 탑이 사라졌지만 황금의 탑은 아직 남아 있다고 해서 기어이 거길 찾아간 거였다. 황금으로 겉을 도금했다고 하여 이름도 황금의 탑이란다. 눈이 부실 것이다. 그런 화려함을 생각하고 거기까지 갔건만, 내 앞에 있는 것은 시멘트 색의 누추하고 초라한 작은 건축물이었다. (탑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작은.)그 앞에 앉아 땀을 닦으며 얼마나 허탈하고 허무하던지. 애써서 40분이나 이곳까지 걸어온 보람이 없었다. 또 탑의 입장료는 왜그리 비싼지 도무지 내 돈내고 들어가기엔 손이 떨렸다. 할 수 없이 그냥 되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는 길에 맛있어 보이는 아이스크림을 정말 큰 마음을 먹고 사먹었다. 이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는데도 거의 30분을 고민했었다. 밥을 먹을지 아이스크림을 먹을지 한참이나 벤치에서 안절부절 고민하다가 들어가서 제일 작은 컵을 사먹었다.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식량이 아닌, 군 것질을 하는 일이 그때는 엄마 몰래 동전을 훔쳐 군 것질을 한 것처럼 그렇게 떨리고 죄책감 느끼는 일이었다. 그늘에 앉아 오랫동안 아이스크림을 먹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도대체 내가 방금 뭘 한 거지. 군 것질을 했단 말야..!

여행자에게는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인 돈. 정해진 돈으로 얼마만큼의 기간을 사는 일이란 말처럼 쉽지가 않다. 게다가 나는 넉넉히 남을만큼 가져가지도 않았고, 모자르다 싶게 가져갔기 때문에 매순간 돈을 치러야 할 때마다 이 돈으로 할 수 있는 다른 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재빠르게 어지럽히고 다시 그 가격을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여 이 돈으로 한국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계산하곤 했다. 그런 궁상은 여행 중반까지 계속됐는데 나는 단돈 500원이 더 싼 물을 찾기 위해 몇 블록을 마다않고 걸어가서 사오기도 하고, 숙소를 잡을 때도 유스호스텔외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며, 현지인들이 잘 가는 식당으로만 다니고, 엽서를 제외한 기념품을 사는 것 조차 수백번을 더 생각해야만 했다. 결국 내가 산 기념품들은 여기와서 친구들에게 내놓기조차 궁색한 조그맣고 초라한 것들이 전부였지만. “돈이 많아서 좋은 것이라면, 스위스제 시계나 이탈리아제 구두를 마음껏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고민이나 망설임, 다리품 따위의 귀찮고 번거로운 노력을 가뿐하게 건너뛸 수 있는 편리함이 아닐까. 배가 고프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제일 마음에 드는 숙소에서 잠을 자며 걷기 피곤하면 언제든 택시를 탈 수 있으니까.” 누군가 이렇게 말해준 것은 그야말로 당시 내겐 진리 그 이상이었다. 그때에 나는 만약 돈을 몽땅 도둑 맞으면? 혹시라도 홀라당 다 써 버리면?..그땐 어쩌지. 하는 끔찍한 생각들을 하루에 적어도 한번씩은 하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열었었다. 비싼 선물이나 명품을 못사서 안타까웠던 것 보다도 지지리도 궁상맞는 이 소비 활동이 그때에 내겐 가장 큰 안타까움이자 죄책감 비슷한 것이었다. 집에 가면 공짜로 밥을 먹고, 공짜로 물을 마시며, 공짜로 잠을 자도 되겠지. 하는 생각들은 가장 큰 위안이 되어주곤 했다.

터벅터벅 숙소로 돌아오며 내일은 꼬르도바로 옮겨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 도시가 벌써 너무 피곤하게 느껴진다. 그놈에 아이스크림 때문에..-_-;;

숙소로 돌아와서 브라질 소년들을 만났다. 내일 떠단다고 말하니 믿을 수 없다고 어떻게 세비야를 3일만에 다 보고 가 버리냐고 오히려 화를 낸다. “미안하다. 그런데 내가 오늘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바람에 더 이상 못있겠어”라는 이유는 말도 안되기 때문에 그냥 대충 둘러댔다. 그래도 잠깐이지만 정도 들었는데 내가 꽁꽁 싸간 한국의 기념품을 하나씩 선물로 줬다. 에두아르도에겐 동자스님의 열쇠고리를, 까에따노에게는 얆은 금박의 호랑이 무늬가 새겨진 아주 작은 사진 끼우는 틀을. (이것은 내가 보기에도 정말 예뻤는데 이 사진틀의 두께는 1mm 정도 되려나. 이렇게 얆은데 용케도 안부러뜨리고 가져간 것이 신기할 정도로 섬세한 사진 틀이었다.) 한참을 또 그들 방앞에 서서 얘길했다. 이렇게 마음 맞는 사람들을 또 만날 수 있을까. 헤어지려니 벌써 아쉬웠다. 또 만나자는 악수를 하고는 헤어졌다.

다음날 나는 꼬르도바로 옮겼는데, 꼬르도바는 생각보다 무척 작은 도시였다. 꼬르도바 시내도 숙소에서 걸어서 갈 수 있었고, 큰 대형 마켓도 있고, 예쁜 집들과 아기자기한 가게들, 유명한 유태인 거리도 이곳에 있었다. (이 거리는 새하얀 벽에 작은 꽃 화분들을 걸어놓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난 5일을 묵었다. 이 곳에도 역시 알카자르가 있었는데 이곳은 알카자르보단 이슬람 사원인 메스키타가 훨씬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투박한 멋이 있는, 굉장히 커다란 사원이었다. 더욱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 메스키타가 바로 내가 묵었던 유스 호스텔에서 10 걸음 떨어진데 있었다는 것이다. 낮에는 황토색 벽이 너무 잘 어울렸고, 밤에는 황금색 문이 번쩍거려서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도시 입구에 있는 로마교까지 너무 고풍스럽고 완벽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난 이 도시가 정말이지 꽤나 마음에 들었었다. 메스키타에 들어가서 보았던 기둥들의 문양이 터키의 블루 모스크에서 그대로 재현된 것을 보고는 퍼즐을 짜맞추듯 너무 놀라웠었다. (물론 터키에서 꼬르도바로 옮겨간 것이다.) 꼬르도바에서는 시내 곳곳을 구석구석 다녔었는데, 시내에서부터 성벽 근처, 게다가 거의 모든 골목들은 헤매다가 다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세비야에 비해서 규모가 작은 것도 마음에 들었었고, 또 룸메이트가 무엇보다 마음이 잘 맞는 아이였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25살 연극을 하는 아이었는데 영어를 단 한 문장도 할 줄 몰랐고 나역시 스페인어를 떠듬떠듬 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얘기를 할 때 주로 사용한 언어는 바디 랭귀지였다. 그러나 소통엔 아무 불편이 없었으며, 나는 그녀의 과거의 남자들과 13년을 사귄 남자와 왜 헤어지게 됐는지까지를 알 수 있었다. 또 그녀는 나의 가족 이야기, 아르헨티나에서 살았던 일이며 어느 국민학교를 다녔는지까지 알 게 되었다. 그때 느꼈던 것인데, 언어는 그다지 중요한게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여행하는데 언어는 필수적으로 중요한 항목이지만, 사람을 알아가는데 첫 번째 조건은 언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이 아르헨티나 여인 전에 있던 룸메이트는 일본인이었는데 그녀는 정말 특이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20대 후반의 이 일본 여인은 우리나라의 시민연대와 같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몸이 너무 안 좋아서 휴가를 내고 여행을 왔다는 것이다. 요양이 아닌 여행을 택한 그녀의 선택에 놀라웠고, 또 그녀가 하는 일에 다시 한번 놀라웠었다. 법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돈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대신 소송을 준비해주고 탄원도 해주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표정은 내가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도 밝고 생명력이 넘쳤다. 신기했던 것은 이 일본 여인이 떠나고 바로 아까 그 아르헨티나 여인이 들어왔는데 알고보니 이전 도시에서 둘이 룸메이트였다는 것이다. 이런 인연이. 그걸 알고는 아르헨티나 여인네와 나는 한참동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와는 알카자르도 함께 가고, 꼬르도바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 근처까지 같이 걸어가기도 했었다. 이 여인네하고는 마음이 너무 잘 맞아서 ‘오늘은..파스타!’ 그러면 그녀도 좋다고 펄쩍펄쩍 뛰기도 하고, 함께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면 그녀는 뭘 고를 때 항상 내게 이걸 먹는지 않먹는지를 물을 정도로 세심했다.

꼬르도바에 있을 때 마침 그때가 축제 기간이어서 일본 여인과 놀러갔었는데 축제에는 의외로 볼거리가 많았다. 멀리서부터 이어지는 다리에 전부 전구를 달고, 그리로 향하는 길의 공중에는 정말 많은 조명이 모양을 이루고 켜져 있었다. 놀이기구가 돌아가고 좌판에는 게임판과 군 것질 거리들이 널려있다. 아이들은 조랑말을 타고 돌아가는 진짜 회전목마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롤러코스터며 귀신의 집까지 없는게 없다. 게다가 마지막에 화려한 불꽃 놀이까지. 정말 예쁘고 감격스러웠다. 그 날 밤 내가 썼던 일기에 이런 말을 적었었다. “외국에서 이렇게 축제도 가보고.. 대단하다 조현정.” 상상이나 했을까. 지구 반대편에서 여행을 준비하는 기간에 내가 이렇게 축제 한복판에 와 있으리라는걸.

 

스페인의 정열, 세비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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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두 명의 소년은 브라질에서 왔다고 한다. 유스 호스텔 로비에서 우리는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알고 있단다. 깜짝 놀라서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내 가이드 북을 보고 한글이라는걸 알았다는 것이다. 더 깜짝 놀란 나는 한국말 할 줄 아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닌데 브라질에는 한국 교포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자기 친구들중에도 “킴”이나 “리”로 불리는 한국 친구들이 많단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묻는 것은 그 가이드 북 외국책을 한국말로 번역한건지 아니면 우리나라에서 직접 사람들이 다니고 만든건지를 묻는다. 그래서 번역된건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만든거라고 말해줬다. (물론 조금은 알고 있었다. 여러나라의 가이드 북을 조금은 짜집기 했으리라는 것..그치만..) 그랬더니 그들은 나보다 더 놀라며 부럽다고 한다. 자기네 나라에는 다른 나라에 대한 가이드 북이 별로 없어서 미국을 경유할 때 론리 플래닛을 샀다고. 가이드 북에 대한 얘기가 한참.. 그들의 유창한 영어가 문득 궁금해진 나는,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너네 영어 무척 잘한다~ 어디서 배운거야? 발음도 네이티브에 가까운데. 다른 언어 할 줄 아는거 있어?” “아..영어는 그냥 브라질에 있으면서 접하는 미국 문화들이 많으니까…우리 또래 애들은 영어 조금씩 다 해. 브라질에서는 포르투갈어를 쓰는데 스페인어와 유사한 부분이 많아서 스페인어도 할 줄 알고…불어도 조금. 얘는 독일어도 해.” 하..하..-_-; 물론 그들의 언어가 한 뿌리에서 왔기 때문에 서양의 다른 언어들을 배우는건 쉽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너무 부러웠다. 참고로, 포르투갈어는 불어와 스페인어를 섞어논 언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발음상으로는 불어에 가깝고 쓰는 것은 스페인어와 유사하다. 그들도 역시 내게 다른 언어 할 줄 아냐고 물어보았다. 그래서 나도 질세라..”음.영어랑, 일본어 조금, 그리고 한자!(후후후-_-+ 이때는 Chinese character라고 표현했다. 물론 그들은 한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브라질에는 중국인 역시 많이 살기 때문에.)”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오늘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그래서 그러자고 약속을 하고 나는 알카자르를 보러 갔다. 저녁때가 되서 다시 만난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세비야 시내 중심가로 향했다.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스페인의 명물, “Paella”를 먹기로 했다.(이 빠에야는 일종의 볶음밥인데, 해물 볶음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여러 가지 해물과 카레색깔 나는 소스를 넣고 볶은거다. 스페인에는 빠에야의 종류만 해도 엄청나다. 오징어 먹물로 볶아서 검정색인 빠에야까지 있다.) 그들의 가이드 북에 소개된 맛있는 빠에야 집을 찾아서 거의 40분을 헤맨 끝에 골목 깊숙히 허름한 빠에야 집을 들어갈 수 있었다. (선술집 분위기다.-_-)저녁을 먹기에는 약간 늦은 시간이었지만(9시였다.저녁)빠에야와 샹그리아를 시키고 기다렸다.(샹그리아 역시 스페인의 명물중 하난데, Sangre는 스페인어로 ‘피’라는 뜻이다. 이 샹그리아라는 술은 붉은 와인에 오렌지와 레몬을 반으로 잘라 넣어서 며칠간 삭혀서 만든 것이다. 이때에 들어간 오렌지와 레몬의 양이 샹그리아의 맛을 결정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술은 말 그대로 핏빛이다. 그래서 Sangrea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우리 뒤쪽 바에 앉아있는 두명의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여행온 사람들인데, 스페인어를 현지인처럼 구사한다. 그리고 이 주인집 아주머니와 허물없이 친해보인다. 매일밤 여기와서 맥주를 마시며 우리같은 여행객들과 만나는 것이 요즘 이 사람의 낙이란다. 나이가 좀 있어보이는 이 사람들은 굉장히 유머러스했는데 한 사람은 조부모가 스페인 사람이어서 스페인어를 하는거라고 했다. 휴가때마다 스페인을 온다나.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 밥은 나올 생각을 안한다. 배고파서 죽을 것 같지만 이 브라질 소년들과 수다를 떨며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자기 이름을 한글로, 그리고 소리나는대로 일어로 써달라고 졸랐다(가타카나 + 히라가나를 섞어서 써줬다. -_-) 나중엔 한문으로 내 이름까지 써보여야 했다. 이들은 한국과 일본, 중국의 관계에 대해 매우 흥미로워했는데 나더러 한국 사람들은 일본을 더 좋아하는지, 중국을 더 좋아하는지 묻기도 했다. 물론 나는 외교활동에서의 가장 중요한 스킬인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본의 흐리기’ 작전을 써서 “한국 사람들은 주변국인 일본과 중국 모두 좋아한다. 물론, 어떤 사람은 둘 중 어느 나라를 특히 더 좋아하거나 특히 더 싫어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집요했다. “아니 대체적으로..어떠냐고. 아니 그럼 니 생각은 어떤데?” “음..대체적으로 둘 모두에게 우호적이야. 나? 내 개인적인 의견은 중국이 지금으로썬 잠재력이 많다고 생각해.”(엉뚱한 대답으로 핵심 피하기 권법)그들이 유스 호스텔에서 나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얘기가 그거였다. “브라질에는 한국, 일본 사람이 특히 많이 살아.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부자들이야. 특히 일본 사람들은. 이상한 건 한국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은 항상 으르렁 대며 싸워. 그 이유가 뭐야?” 너무나 난감했었다. 챙피하기도 하고. 집안일을 들킨 기분이랄까. 그래서 그건 두 나라의 역사에 얽힌 문제도 있을거라고 얘기해줬었다.

이 두소년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81년생의 풋풋한 소년들이다. 둘 다 상파울로 대학 사회학과에 재학중이다. (상파울로 대학은 남미 최고의 대학이다.) 무척이나 똑똑했던 이들은 미국을 굉장히 싫어하는 혈기 왕성한 소년들이었는데, 키가 큰 쪽은 “Eduardo”라는 이름을, 키가 작은 쪽은 “Caetano”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까에따노는 스스로를 소개할 때, “안녕 나는 까에따노야. 너 혹시 미국 좋아하는 애니?” 라고 물을 정도로 자신의 신념을 숨기지 않았는데, “I’m socialist”라고 자신을 밝히던 이 소년은 말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토론의 황제였다. 그의 아버지는 브라질의 민주화 운동 당시 앞장섰던 사람중 한 명으로 옥살이를 하며 갖은 고문을 당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음반 프로듀스를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 소년은 음악에, 특히 브라질 음악에 애정이 많았다. (씨디를 50장 정도 가지고 왔으니 말 다했지. 뭐..)에두아드로의 경우, 키가 193cm에 달하는 장신이었는데, 이 소년은 너무나 재치가 넘치는 소년이었다. 할아버지는 독일의 정신과 관련 서적을 번역하던 정신과 의사였고, 현재 아버지 역시 정신과 의사다. (그래서 그런지 모른다. 이 소년이 너무나 재치넘치고 엉뚱했던건.) 어느날 피아노가 너무 치고 싶어서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 이 소년은 자신의 연주회가 열리던 자리에서 근엄한 모습으로 청중앞에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젓가락 행진곡을 쳤던 적이 있을 정도로 엉뚱하다. (이 소년은 기념선물을 살 때, 자신의 피아노 선생님의 선물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선물은 기념품이 아닌 애정이 담긴 선물이었다. 그야말로 생각나서 하는 선물… 그것은 피카소가 그린 피아노 치는 여인이라는 그림이었다.)

두 시간을 기다린 끝에 다 만들어진 빠에야를 볼 수 있었다. 11시부터 밥을 먹었는데 밥을 먹고 난 시간은 새벽 한 시였다..-_-;; 어찌나 느리고, 많은 얘기들을 하며 먹는지. 한국에서도 밥을 빨리 먹는 편은 아닌데 답답해서 혼났다. 밥을 다 먹고 식당 아주머니가 자랑스럽게 내민 방명록에 우리나라 지도랑 한국말로 글까지 남기고 가게문을 나섰다. 너무 늦어서 택시를 타기로 했다. 밤거리는 무척 위험하다. 택시를 잡으려고 서있는데 “하시시?” 라고 물으며 마약을 사기를 권하는 나이 어려보이는 청소년들이 다가왔다. 싫다고 좋게 거절하자 에두아르도의 옷을 잡아당기며 끌고 갈 태세다. 가볍게 뿌리쳤더니 뭐라고 뭐라고 욕을 하고는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진다. 물론 그 근처에는 우리 외에도 영어를 쓰는 남녀의 여행객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약을 사기로 했고, 그들이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 여행객들 맞은편에는 커다란 동상이 있는데 그 뒤로 롤러 블레이드를 탄 두명의 일당이 숨어있다. 설명을 들으니, 저 아이들이(영어를 쓰는 여행객들) 마약에 취하면 지갑을 털려고 기다리는 애들이란다. 혼자 다니기엔 너무나 위험해보이는 밤거리였다.

유스 호스텔로 돌아와서 헤어지려는데, 브라질 식 인사법을 가르쳐준다. 양 볼에 가볍게 뽀뽀를 하는건데 난 처음에 너무나 어색해서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들은 괜찮다며 잘자라고 한국식으로 인사를 한다. 90도로 꺾어서 인사를 하지 않겠는가.(어디서 보고 배웠는지..나참.-_-;;)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은 기필코 브라질 식 인사법으로 인사해야겠다 다짐하며 잠이 들었다.후후후후…-_-+

세비야에서 하루를 더 묵고 나는 Cordoba라는 도시로 이동했다. 그 이후로 이 브라질 소년과는 볼 기회가 없었는데, Cordoba의 다음 도시, Granada에서 이들을 또 만나게 된다. 우연이었을까…?

 

스페인의 정열, 세비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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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세비아. 이름도 예쁜 이곳은, 바로 스페인에서도 정열적이고 화끈한 사람들이 사는 곳, 안달루시아 지방의 자랑거리, 스페인 제2의 관광도시이다. 세비아에서 스페인의 그 유명한 플라멩꼬가 나왔다. 여기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플라맹꼬 바가(이름이 따로 있는데 생각이 안나네..)있는 곳이기도 하다. 흔히 사람들이 ‘정열의 스페인’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안달루시아 지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곳은 정말 엄청나게 덥기도 하고, 사람들이 정말 목소리가 크다.

포르투갈의 Faro라는 큰 항구도시에서 아침 첫버스를 타고 세비야로 왔다. 세비야로 오는 관광객이 얼마나 많으면 이렇게 직행버스까지 있다. (Faro에 대한 얘기는 언급을 하지 않겠다. 별로 할 말이 많지 않은, 정말 큰 항구도시였다. 하루밖엔 묵지 않아 잘 생각이 나지도 않고.) 세비야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 이 더위에, 숨이 막힐 듯한 건조함과 더위에 기겁을 했다. 스페인 남부는 40도를 웃도는 온도다. 그렇지만 그 건조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하지만 그 덕에 그늘에만 들어가면 서늘하다. 아무리 40도를 웃도는 날씨여도. 끈적끈적해서 짜증나는 일은 없었다. 세비야에는 관광객이 정말로 많다. 거의 반이 플라맹꼬를 보러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특징이랄 수 있는 이슬람 양식의 건물들은 이 도시를 더욱 특별하게 하는 이유이다. 이슬람 세력이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이 남쪽 지방은 정말 특이하다. 곳곳에 있는 탑, 공공건물들은(역사가 깊은) 어김없이 이슬람 양식으로 지어졌다. 스페인 광장 역시 이슬람 양식으로 되어져 있다. 이 도시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곳은 마리아 루이사(스페인에서 가장 인자하기로 유명했던 여왕)공원이다. 공원이 공원이 아니다. 하나의 도시 같다. 공원이 어찌나 큰지. 몇 개의 박물관이 공원안에 들어가져 있고, 여러개의 분수와 수없이 많은 마차들. (그에 따르는 말똥들..정말 지저분하다. 마차가 다니는 길이 언제나 따로 있지만, 이런 공원에는 그런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잘못하다간 말똥을 밟을 수 있다.)이 공원은 정말 한적하다. 사람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렌지 나무가 곳곳에 있고, 길에는 오렌지가 떨어져 있으며, 저 쪽에서는 분수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 그늘마다 들어서 있는 벤치들이 한적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 공원은 꽤나 유명해서 가족단위로,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와서 쉬곤 한다. 아무튼 땡볕을 피해 이곳 그늘에 앉아 있으면 어느새 한기가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이곳의 또하나의 볼거리는 알카자르(Alcazar)라는 이슬람 성인데,(Alcazar는 아랍어로 ‘성’이라는 뜻) 세비야에서는 Real Alcazar로 통한다. 가장 유명하기도 하고, 가장 복원되지 않은 원 모습에 가깝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성안은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보통 중세 시대의 성들이 크고 위풍 당당했다면 이 알카자르들은(안달루시아 지방엔 여러개의 알카자르가 있다.)예쁘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아기자기한 무늬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고, 어딜가나 의미가 없는 정원이나 장소들이 없다. 그 바로 맞은편에는 대성당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그 규모와 소장품들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슬람 세력이 물러가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이렇게 대성당을 짓는 일이었는데, 차마 이곳의 알카자르는 너무 아름다워서 헐지 못하고 그 바로 앞에 대성당을 짓는 것으로 대신했다 한다. 관광도시인 만큼 이곳의 물가도 만만치 않은데 플라맹꼬를 꼭 보고 싶었으나 돈도 없었고,(엄청 비싸다.)그다지 흥이 나질 않았다. 혼자서 갈려니..

유스 호스텔은 시설이 정말 좋았다. 대부분의 스페인 유스 호스텔들이 시설이 좋은 것 같다. 이 곳 역시 침대도 많고, 시설도 좋기로 유명하다. 장기간 투숙자도 몇 있고…처음 세비야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고, 유스 호스텔 안에 인터넷을 할 수 있는 기계가 있다는 것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우리나라 돈으로 600원 정도 하는 돈을 넣으면 10분 정도를 쓸 수가 있다. 오자마자 샤워를 막 끝내고, 시내 관광을 하러 나가려다가 이 인터넷 기구가 너무 신기해서 기쁜 마음으로 동전을 넣었다. 그때는 진까 가슴까지 두근거렸다. 마치 처음 접하는 문명인양. 얼마나 반가웠던지. 이것저것 조작을 해보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건다. 돌아보니, 키가 멀대처럼 큰 소년과 키가 그보다 작은 소년 둘이 서있다. 나를 보며 하는 말이, “여기는 인터넷이 비싸. 유스 호스텔을 나가서 저 코너만 돌면 훨씬 싸게 인터넷을 할 수 있는데가 있는데..” 그러나 순간 나는 엄청난 경계심을 품고 톡 쏘아주었다. “그럼 너네가 가지 그래?”, 그랬더니 둘다 엄청나게 놀라고 당황하며 “아니, 우리는 인터넷 쓸 일이 없어. 단지, 너에게 좋은 정보를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라며 약간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다.

그때는 몰랐다. 이 소년 중 한 명과 내가 로맨스를 꿈꾸게 되리라곤. 언제나 그렇지만 모든 첫만남은 항상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일로 이루어진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들은 그때 나의 반응에 굉장히 겁에 질렸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