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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의 유스 호스텔에 있던 나의 룸메이트는 말레이시아에서 왔다는 나이 지긋한 건축가 한 명과 호주에서 온 내 또래의 아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분은 유럽이 벌써 세 번째란다. 세 번의 여행동안 스페인을 못들러서 스페인만 여행하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무척 혈기 왕성했던 이 여인은 아침 일찍 나가서 오후6시가 되면 어김 없이 정각에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곤 샤워를 하고 책을 읽었다. 저녁때 내가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으면 그녀는 또 어김 없이, 샤워를 하고 나서는 절대로밖에 나가지 않는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녀는 시드니 쉘던의 소설을 읽었는데, 말레이시아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 물어보자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영어라고 대답했었다. 물론 말레이시아어가 따로 있지만 공공기관을 제외하고는 모든 곳에서 영어를 쓴다는 것이다. 은행이나 작은 식당, 길거리의 가판대에서도. 어떤 기분일까. 내가 사는곳에선 모두가 다른 나라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호주아이는 작년 9월부터 여행을 하고 있는 아이었는데, 대부분의 서양 아이들이 그러듯이 영국에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여행을 하고 있단다. 그때가 6월이었는데..부모님이 보고싶다거나, 집이 그립지 않냐고 물으니 웃으며 그래서 작년 크리스마스때 부모님이 영국으로 자기를 보러 왔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올해 크리스마스엔 집에서 보내고 싶다는 것이 그녀의 작은 소망이었다.
세비야에서 3일을 있었는데, 첫 날은 알카자르를, 두 번째 날은 대성당과 황금의 탑을 보러 갔었다. 두 번째 날은 거의 하루종일 걸었는데 그 더운 날씨에 대성당에서 황금의 탑까지 걸어가던 코스가 가장 큰 고비였다. 그 거리가 상당하기도 했지만 옆으로 말이 끄는 마차가 지나가니 타고 싶은 유혹을 견디는 것이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물론 마차를 타려면 택시비보다 더 비싼 대금을 지불해야 하고, 게다가 마차를 타고가는 백인들의 한 결 같은 부르주아틱한 분위기가 너무 싫어서 마음이 가질 않았다. 거의 40분을 걸어서 도착한 황금의 탑은 과달키비르 강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원래는 황금의 탑 맞은편에 은의 탑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쌍으로 이 도시를 지키는 탑이었던 거다. 지금은 은의 탑이 사라졌지만 황금의 탑은 아직 남아 있다고 해서 기어이 거길 찾아간 거였다. 황금으로 겉을 도금했다고 하여 이름도 황금의 탑이란다. 눈이 부실 것이다. 그런 화려함을 생각하고 거기까지 갔건만, 내 앞에 있는 것은 시멘트 색의 누추하고 초라한 작은 건축물이었다. (탑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작은.)그 앞에 앉아 땀을 닦으며 얼마나 허탈하고 허무하던지. 애써서 40분이나 이곳까지 걸어온 보람이 없었다. 또 탑의 입장료는 왜그리 비싼지 도무지 내 돈내고 들어가기엔 손이 떨렸다. 할 수 없이 그냥 되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는 길에 맛있어 보이는 아이스크림을 정말 큰 마음을 먹고 사먹었다. 이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는데도 거의 30분을 고민했었다. 밥을 먹을지 아이스크림을 먹을지 한참이나 벤치에서 안절부절 고민하다가 들어가서 제일 작은 컵을 사먹었다.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식량이 아닌, 군 것질을 하는 일이 그때는 엄마 몰래 동전을 훔쳐 군 것질을 한 것처럼 그렇게 떨리고 죄책감 느끼는 일이었다. 그늘에 앉아 오랫동안 아이스크림을 먹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도대체 내가 방금 뭘 한 거지. 군 것질을 했단 말야..!
여행자에게는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인 돈. 정해진 돈으로 얼마만큼의 기간을 사는 일이란 말처럼 쉽지가 않다. 게다가 나는 넉넉히 남을만큼 가져가지도 않았고, 모자르다 싶게 가져갔기 때문에 매순간 돈을 치러야 할 때마다 이 돈으로 할 수 있는 다른 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재빠르게 어지럽히고 다시 그 가격을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여 이 돈으로 한국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계산하곤 했다. 그런 궁상은 여행 중반까지 계속됐는데 나는 단돈 500원이 더 싼 물을 찾기 위해 몇 블록을 마다않고 걸어가서 사오기도 하고, 숙소를 잡을 때도 유스호스텔외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며, 현지인들이 잘 가는 식당으로만 다니고, 엽서를 제외한 기념품을 사는 것 조차 수백번을 더 생각해야만 했다. 결국 내가 산 기념품들은 여기와서 친구들에게 내놓기조차 궁색한 조그맣고 초라한 것들이 전부였지만. “돈이 많아서 좋은 것이라면, 스위스제 시계나 이탈리아제 구두를 마음껏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고민이나 망설임, 다리품 따위의 귀찮고 번거로운 노력을 가뿐하게 건너뛸 수 있는 편리함이 아닐까. 배가 고프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제일 마음에 드는 숙소에서 잠을 자며 걷기 피곤하면 언제든 택시를 탈 수 있으니까.” 누군가 이렇게 말해준 것은 그야말로 당시 내겐 진리 그 이상이었다. 그때에 나는 만약 돈을 몽땅 도둑 맞으면? 혹시라도 홀라당 다 써 버리면?..그땐 어쩌지. 하는 끔찍한 생각들을 하루에 적어도 한번씩은 하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열었었다. 비싼 선물이나 명품을 못사서 안타까웠던 것 보다도 지지리도 궁상맞는 이 소비 활동이 그때에 내겐 가장 큰 안타까움이자 죄책감 비슷한 것이었다. 집에 가면 공짜로 밥을 먹고, 공짜로 물을 마시며, 공짜로 잠을 자도 되겠지. 하는 생각들은 가장 큰 위안이 되어주곤 했다.
터벅터벅 숙소로 돌아오며 내일은 꼬르도바로 옮겨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 도시가 벌써 너무 피곤하게 느껴진다. 그놈에 아이스크림 때문에..-_-;;
숙소로 돌아와서 브라질 소년들을 만났다. 내일 떠단다고 말하니 믿을 수 없다고 어떻게 세비야를 3일만에 다 보고 가 버리냐고 오히려 화를 낸다. “미안하다. 그런데 내가 오늘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바람에 더 이상 못있겠어”라는 이유는 말도 안되기 때문에 그냥 대충 둘러댔다. 그래도 잠깐이지만 정도 들었는데 내가 꽁꽁 싸간 한국의 기념품을 하나씩 선물로 줬다. 에두아르도에겐 동자스님의 열쇠고리를, 까에따노에게는 얆은 금박의 호랑이 무늬가 새겨진 아주 작은 사진 끼우는 틀을. (이것은 내가 보기에도 정말 예뻤는데 이 사진틀의 두께는 1mm 정도 되려나. 이렇게 얆은데 용케도 안부러뜨리고 가져간 것이 신기할 정도로 섬세한 사진 틀이었다.) 한참을 또 그들 방앞에 서서 얘길했다. 이렇게 마음 맞는 사람들을 또 만날 수 있을까. 헤어지려니 벌써 아쉬웠다. 또 만나자는 악수를 하고는 헤어졌다.
다음날 나는 꼬르도바로 옮겼는데, 꼬르도바는 생각보다 무척 작은 도시였다. 꼬르도바 시내도 숙소에서 걸어서 갈 수 있었고, 큰 대형 마켓도 있고, 예쁜 집들과 아기자기한 가게들, 유명한 유태인 거리도 이곳에 있었다. (이 거리는 새하얀 벽에 작은 꽃 화분들을 걸어놓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난 5일을 묵었다. 이 곳에도 역시 알카자르가 있었는데 이곳은 알카자르보단 이슬람 사원인 메스키타가 훨씬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투박한 멋이 있는, 굉장히 커다란 사원이었다. 더욱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 메스키타가 바로 내가 묵었던 유스 호스텔에서 10 걸음 떨어진데 있었다는 것이다. 낮에는 황토색 벽이 너무 잘 어울렸고, 밤에는 황금색 문이 번쩍거려서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도시 입구에 있는 로마교까지 너무 고풍스럽고 완벽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난 이 도시가 정말이지 꽤나 마음에 들었었다. 메스키타에 들어가서 보았던 기둥들의 문양이 터키의 블루 모스크에서 그대로 재현된 것을 보고는 퍼즐을 짜맞추듯 너무 놀라웠었다. (물론 터키에서 꼬르도바로 옮겨간 것이다.) 꼬르도바에서는 시내 곳곳을 구석구석 다녔었는데, 시내에서부터 성벽 근처, 게다가 거의 모든 골목들은 헤매다가 다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세비야에 비해서 규모가 작은 것도 마음에 들었었고, 또 룸메이트가 무엇보다 마음이 잘 맞는 아이였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25살 연극을 하는 아이었는데 영어를 단 한 문장도 할 줄 몰랐고 나역시 스페인어를 떠듬떠듬 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얘기를 할 때 주로 사용한 언어는 바디 랭귀지였다. 그러나 소통엔 아무 불편이 없었으며, 나는 그녀의 과거의 남자들과 13년을 사귄 남자와 왜 헤어지게 됐는지까지를 알 수 있었다. 또 그녀는 나의 가족 이야기, 아르헨티나에서 살았던 일이며 어느 국민학교를 다녔는지까지 알 게 되었다. 그때 느꼈던 것인데, 언어는 그다지 중요한게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여행하는데 언어는 필수적으로 중요한 항목이지만, 사람을 알아가는데 첫 번째 조건은 언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이 아르헨티나 여인 전에 있던 룸메이트는 일본인이었는데 그녀는 정말 특이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20대 후반의 이 일본 여인은 우리나라의 시민연대와 같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몸이 너무 안 좋아서 휴가를 내고 여행을 왔다는 것이다. 요양이 아닌 여행을 택한 그녀의 선택에 놀라웠고, 또 그녀가 하는 일에 다시 한번 놀라웠었다. 법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돈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대신 소송을 준비해주고 탄원도 해주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표정은 내가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도 밝고 생명력이 넘쳤다. 신기했던 것은 이 일본 여인이 떠나고 바로 아까 그 아르헨티나 여인이 들어왔는데 알고보니 이전 도시에서 둘이 룸메이트였다는 것이다. 이런 인연이. 그걸 알고는 아르헨티나 여인네와 나는 한참동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와는 알카자르도 함께 가고, 꼬르도바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 근처까지 같이 걸어가기도 했었다. 이 여인네하고는 마음이 너무 잘 맞아서 ‘오늘은..파스타!’ 그러면 그녀도 좋다고 펄쩍펄쩍 뛰기도 하고, 함께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면 그녀는 뭘 고를 때 항상 내게 이걸 먹는지 않먹는지를 물을 정도로 세심했다.
꼬르도바에 있을 때 마침 그때가 축제 기간이어서 일본 여인과 놀러갔었는데 축제에는 의외로 볼거리가 많았다. 멀리서부터 이어지는 다리에 전부 전구를 달고, 그리로 향하는 길의 공중에는 정말 많은 조명이 모양을 이루고 켜져 있었다. 놀이기구가 돌아가고 좌판에는 게임판과 군 것질 거리들이 널려있다. 아이들은 조랑말을 타고 돌아가는 진짜 회전목마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롤러코스터며 귀신의 집까지 없는게 없다. 게다가 마지막에 화려한 불꽃 놀이까지. 정말 예쁘고 감격스러웠다. 그 날 밤 내가 썼던 일기에 이런 말을 적었었다. “외국에서 이렇게 축제도 가보고.. 대단하다 조현정.” 상상이나 했을까. 지구 반대편에서 여행을 준비하는 기간에 내가 이렇게 축제 한복판에 와 있으리라는걸.